제3부 <3000m 절벽의 신비, 탁상라캉 사원> 

<조랑말 타고 호랑이 둥지로>

도촐라 고개에서 부탄의 옛 수도 푸나카로 내려가는 도중 평화롭기 그지없는 한 농촌 마을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 앞 밭에는 배추(우리 봄동 비슷한 거친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동안 신선한 야채에 굶주렸던 여성 일행들이 신이 났다. 식당에 부탁해 배추를 뽑아다 실컷 쌈을 싸 먹었다. 그것만으로 성에 안차 저녁에 먹겠다며 여러 포기 뽑아 챙겼다. 도촐라 고개는 아름답지만 슬픔이 배인 곳이었다. 여기는 마을이 제법 깨끗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이 따스했다. 연성수 도사가 “살만한 곳”이라고 한다. 그는 은퇴한 뒤 도 닦으며 살 곳을 물색 중인데 이곳을 후보지 중의 하나로 점 찍었다.

식당 저 쪽에 서양 관광객 한 팀이 와 식사 중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여행객이다. 미국 전역에서 모여 왔다고 한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익살스런 포즈를 취하는 부탄 어린이들.>

저 아래 푸나카 종(Dzong)이 나타났다.  오른 쪽은 아버지 강 포추, 왼쪽은 어머니 강 모추. 그 한가운데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 푸나카 종은 부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이다. 중세풍의 멋진 다리를 건너 종으로 간다. 광장 내부에는 깨달음의 나무라는 보리수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여러 번의 지진과 홍수에도 파손되지 않고 남아있는 한 불상이 이곳의 자랑이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한다. 나도 50루피 시주하고 빌었다.  

<포추강과 모추강으로 둘러싸인 푸나카 종. 옛 수도 푸나카에 있으며 부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으로 알려져있다>

다음 날 중부도시 왕디에포드랑에서 불타 폐허가 된 사원을 구경하고 파로로 이동했다. 파로는 부탄 유일의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다. 보잉기 두 대가 싱가폴, 카트만두 등으로 운행한다고 한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바라본 공항은 비행기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가 한대도 보이지 않는 파로 공항. 부탄의 유일한 국제 공항이다.>

모처럼 5성급 호텔에서 묵었다. 목재로 지어진 호텔은 온갖 멋을 다 냈다. 요즘 부탄에선 이런 호텔이 많이 지어진다고 한다. 그곳 테라스에서 민속 가면 춤을 보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보름달이 저쪽 나무 위로 둥실 떠오른다.

파로에는 부탄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탁상라캉 사원이 있다. 탁상라캉은 3000m 절벽 벼랑 끝에 세워진 부탄 불교의 상징이다. 8세기 무렵,  티베트의 고승 파드마 삼바바가 호랑이 등을 타고 날아와서 세웠다고 한다. 일명 ‘호랑이 둥지’라고도 불린다.

아침 일찍 우리는 버스를 타고 산 밑까지 갔다. 그곳에서 조랑말을 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급경사와 험로가 많아 걸어가면 왕복 5-6시간이 걸린다. 1인당 25달러를 내고 조랑말을 타기로 했다. 현지인 마부들이 여러 명 동행했다.

한데 말들이 참 맹랑했다. 무슨 심보인지 절벽 쪽으로 바짝 붙어 걷는다. 그렇지 않아도 험로이고 바위도 많아 비틀거리는데 왜 이 친구들은 자꾸만 절벽 끝으로 걷는 것일까. 버릇이란다. 가슴이 서늘하지만 참는 것 외에 방도가 없다. 이곳에 온 뒤 ‘낭떠러지 공포’는 너무 많이 겪었다. 못 본체 그러려니 한다. 1시간 반을 말을 타고 갔다.

그 다음은 말에서 내려 640개의 돌계단을 걸어야 했다. 고도가 3000m를 넘어서자 숨이 차고 어지럽다. 남들은 괜찮아 보이는데 나는 고소증이 살짝 일어나는 모양이다. 서양 관광객들도 많이 보인다. 뉴욕에서 왔다는 젊은 커플을 향해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유창한 영어로 “정반대 세상에서 왔구나” 하자 그렇다며 활짝 웃는다.

저쪽 절벽에서는 폭포가 요란하게 쏟아진다. 이런 산 꼭대기에 저런 폭포가 존재하는 건 ‘빙하’ 때문이란다. 설산의 빙하가 녹아 사시사철 흘러내린다는 것이다.

<8세기 고승 파드마 삼바바가 호랑이 등을 타고 와 호랑이 굴 위에 지었다는 탁상라캉 사원. 3000m 높이 절벽에 세웠다>

사원은 고색 창연했다. 주변 풍경과 어울려 신비감을 품어냈다. 하도 근사해서 저절로 감복하는 마음이 들었다. 입구에 있는 경비원이 방문객들에게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입장하라고 했다. 사진기와 배낭은 물론 모자와 선글래스도 벗어야 했다. 그건 룰이니까 따르면 된다. 하지만 경비원의 말투와 태도가 권위적이고 오만했다. 이곳에선 자기가 법이라는 투였다. 이처럼 오래된 아름다운 사원에서 낯선 권력이 밸런스를 깨뜨리며 재를 뿌리고 있었다. 이 영적인 나라 부탄에도 한쪽 구석에서 이런 식으로 못된 싹이 자라고 있었다.  

파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드룩겔 종(Dzong)은 불에 탄 후 복원하지 않아 폐허로 남아있는 곳이다. 1644년과 1648년 두 차례 티베트의 공격을 물리친 성채로 내셔널지오그래피 커버에도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해질녘의 폐허가 주는 가슴 서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복원하지 않은 채 폐허로 남아있는 드룩겔 종. 해질녘 폐허의 쓸쓸함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했다. 내셔널지오그라피 지 표지에도 오른 건축물이다.>

버스를 타고 다시 국경도시 푼촐링으로 돌아간다. 내일은 낮 12시 10분 콜카타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바그도그라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새벽 4시 출발이다. 일찍 잠을 자야 맞겠지만 정원에 빙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부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갑자기 안내인의 출동 명령이 떨어진다. 단체 비자를 약속했던 인도 영사관 측이 변덕을 부려 개별 면접을 요구했다. 자던 사람들도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여권님’을 대동한 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영사관으로 갔다.(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선 여권은 ‘여권님’으로 불린다. 아침 저녁 문안인사를 잘 올려야 한다. 여권을 분실하면 큰일이다. 여행을 포기하고 즉시 한국영사관이 있는 대도시로 가야 한다. 비자까지 발급받으려면 일정이 오래 걸려 비행기 표도 모두 새로 끊어야 한다. 돈도 2000만원쯤 든다고 한다.)

인도 측이 밤 10시 넘어 영사업무를 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비자를 받고 다시 국경을 넘어와 부탄 호텔에서 자고 새벽에 인도로 재입국했다.

<콜카타-타고르, 마더 테레사, 칼리 여신>  

다시 비좁고 붐비는 땅으로 왔다. 콜카타는 어렸을 때 캘커타로 배웠던 곳. 인구는 1500만명이나 된다. 자동차들은 거리를 메우고 경적소리는 끊이지 않고 사람은 많다. 부탄에서의 고요함이 아주 먼 추억처럼 아른거린다. 

 시인 타고르의 생가를 찾아 간다. 타고르의 집은 부유해서 성채와 같다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골목 길은 더럽고 참기 힘든 냄새가 난다. 오물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하수구 곁으로 차를 파는 상점이 있고 신상도 있다. 그 곁에 담요를 뒤집어 쓴 사람이 죽은 듯 아무렇게나 엎드려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옆으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서 얘기하고 먹는다. 지나가는 우리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그렇게 한 블록을 가자 궁전 같은 집이 나타난다. 잘 꾸며진 넓은 정원엔 타고르의 동상이 서 있다. 너른 마당에서는 인도와 중국의 화평을 위한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목재 건물의 위층은 기념관이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의 일생이 묵직하게 펼쳐진다. 타고르가 그린 자화상이 가장 인상적이다. 고뇌가 가득 담긴 표정 아래 “고통스런 불확실성(agony of uncertainty)에 괴로워하던” 타고르의 얘기가 써 있다. 영국에 유학하고 궁전 같은 화려한 집에 살지만 집 밖으로 한발만 나서면 빈민들의 삶이 펼쳐진다. 타고르는 시인이니까 이 점이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힌두 신들은 남녀의 노골적인 애무를 표현한 것이 많다>

<가축과 사람이 공존하는 콜카타 시내의 뒷골목 풍경>

<타고르의 생가 곁 골목길의 이발사.>

<시성 타고르 생가와 타고르 흉상>

<성녀 마더 테레사 동상>

콜카타는 성녀로 추앙받는 마더 테레사가 처음 발을 디뎠던 곳이다. 한 평 남짓의 방엔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있다. 그녀는 마지막도 이곳에서 맞았다고 한다. 인도는 화려한 도심 바로 뒤에 더러운 빈민촌이 있고 또 이런 한적한 공간들도 숨어있다. 

영국인들이 타지마할을 본떠 3200km 떨어진 곳에서 실어온 대리석들로 지었다는 빅토리아 기념관도 있고 수령 225년에 둘레 420m, 1600여개의 뿌리로 나무 한 그루가 혼자 숲을 이루는 세계최대의 반얀나무도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룬 세계 최대의 반얀나무. 한 나무에서 뻗어나온 1600여개의 뿌리가 둘레 420m를 덮는다.>

저녁에 시장 통에 있는 힌두교 칼리 사원을 찾아갔다. 사원은 초만원이다. 무슨 소리들이 요란하게 귀청을 때린다. 칼리 신상이 있는 방은 공물을 바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공물을 담은 바구니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한발이라도 더 나가려고 거의 아귀다툼을 한다. 복을 빌고 무언가를 소원하기 위해 ‘결사적인 투쟁’을 하는 모습이 기괴하다.

밖엔 전쟁의 신이고 권력의 신인 칼리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빽빽하다. 시장이라지만 다른 물건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콜카타 시장 한복판에 있는 칼리 사원>

인도의 박물관엔 신상이 무척이나 많지만 칼이나 창 등 무기도 꽤 많이 진열돼 있다. 칼은 종류도 다양하고 무척이나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

 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라서 옛날에도 전쟁이 별로 없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으나 그건 전혀 아닌 것 같다. 무척 많은 전쟁과 반란이 있었고 그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도 부자들의 집은 마당 안이 차로 몇 분을 달려야 할 정도로 넓다고 한다. TV를 틀면 화려한 무대에서 춤과 노래가 쏟아지고 객석에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네들이 그걸 구경하며 웃는 장면이 수시로 나온다. 특이한 나라다. 부자는 한없이 부자고 가난한 이들은 한없이 가난하다. 그 차이에 대해 다들 무심한 얼굴이다. 강자는 먹고 약자는 먹이가 되는 약육강식에 대해 모두가 인정하는 듯한 초탈한 얼굴이다. 남들은 인도에 오면 저절로 명상에 잠기고 마음도 정화된다는데 나는 왜 자꾸 화가 나는 걸까. 왜 이 동네가 그토록 불공정하게 느껴지는 걸까.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선 누구나 손을 모아 빈다는 점이다. 강자도 빌고 약자도 빈다. 비는 내용은 다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연고로 3억3천이나 되는 신과 무수한 사원이 필요했던 걸까. 이곳은 윤회가 있는 곳이니까 죽어서는 서로 입장을 바꿔 살게 되겠지. 그래야 공평한 것 아닐까.

<바둑이야기 2>

바둑판의 수(手)에는 선(善)과 악(惡)이라는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 상황의 최선을 찾는 게 바둑이다. 상황은 한 수마다 변하고 최선도 한 수마다 변하는 것이기에 어떤 노선이나 이데올로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최선이란 상대를 괴롭혀 쓰러뜨리는 것이기에 일반적인 개념의 ‘착한 짓’이란 존재할 수 없다.

바둑의 수는 정수, 악수, 꼼수, 승부수, 완착, 무리수, 헛수, 강수, 패착 등으로 나뉜다.

정수는 좋은 것이다. 정수는 법수(法手)라고도 불린다. 법대로 두면 정수라는 뉘앙스다.  그렇다면 정수로만 두면 바둑을 이길 수 있는 걸까. 아니다. 바둑이란 예기치 않게 악수나 완착을 두어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 그 때는 정수를 포기하고 비상수단을 강구해야만 한다. 고수들 바둑에선 형세가 여의치 않은데도 정수로만 두다가 지는 것을 가장 바보스러운 짓으로 여긴다. 이 때의 정수는 오히려 완착이 되고 패착이 된다.

불리할 때 등장하는 게 강수다. 패배를 각오한 강수는 특히 승부수라 부른다. 강수든 승부수든 그게 실패하면 무리수가 된다. 꼼수는 무엇인가. 속이 훤히 보이는 수법으로 하수를 속여먹으려는 것을 꼼수라 한다. 꼼수도 수는 수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 하지만 바둑과 인생의 다른 점은 또 있다. 바둑은 여러 판을 둘 수 있지만 인생은 한번뿐이란 사실이다. 바둑은 불리하면 언제든지 승부수를 던지고 옥쇄를 각오하며 몸을 던질 수 있다. 그런 강력한 저항이 상대로 하여금 ‘부자 몸조심’을 하도록 만들고 그런 양보가 이어져 형세는 점점 비슷해져 간다. 고수끼리의 승부는 그래서 한쪽이 아예 부러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집 같은 미세한 승부가 된다.

하지만 실제 삶에선 형세가 아무리 꼬여도 승부수를 던지기란 쉽지 않다. 단 한번뿐인 인생을 옥쇄로 마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망설이다가 세월은 흐르고 그 다음은 체념 아니면 달관으로 흘러가게 된다. 

인도에도 수많은 반역과 저항이 있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저 잘 만들어진 칼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여 저 몰염치하고 불공정한 카스트제도로 굳어졌을 것이다. 내가 잠깐 본 인도는 겉으로 비치는 풍경으로만 보면 엄청난 빈부 차이에 대해 부자든 가난한 이든 별 감정이 없는 듯 보인다. 아주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듯 보인다. 전혀 미안해 하지 않고 전혀 화내지 않는다.

바둑의 이치를 빌린다면 만약 이 세상에 승부수도 옥쇄도 없다면 ‘부자 몸조심’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월한 강자는 약자에게 정수, 즉 법수만 두라고 요구한다.  그게 바로 꼼수다. 그 꼼수로 인해 빈부의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그러므로 바둑의 승부가 비정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바둑은 텅 빈 판에 마주 앉아 서로 한 수씩 번갈아 둔다. 칫수도 있어서 때로는 접어준다. 물릴 수도 없고 판을 뒤집어도 진다. 이런 정도의 공평함도 세상에선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

콜카타에서 싱가폴을 거쳐 서울로 왔다. 부탄에서 산 CD를 가끔 듣는다. 현지 민속 음악이라는데 우리 아리랑과 거의 똑 같다. 다시 들으니 참 좋다. 왜 이렇게 비슷한 음악이 부탄에 있는 걸까.  종교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게 아리랑과 다르긴 하지만 아리랑의 음조에 익숙해서인지 마음이 참 편해지는 음악이다. 표지에 ‘힐링 챈트’(healing chant) 란 단어가 보인다. 해석하자면 치유의 노래쯤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