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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흑백광장] 기권패-시간패-양자패…2015 반상사고 日誌
2015/09/21(16:05)
글쓴이 |
조회: 6,638 | 꼬리말:5

기권패-시간패-양자패…2015 반상사고 日誌

지난 8월 15일 광복절 밤,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선 진귀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바둑을 대표하는 천하의 박정환이 기권패를 당한 것이다. 대국 개시시각(6시 30분)이 지나도록 대국자가 나타나지 않자 심판을 맡은 이홍열 九단은 15분을 기다린 뒤 규정에 따라 박정환의 기권패를 선언했다.

박정환과 대국 예정이던 백홍석은 돌 한 번 잡지 않고 귀중한 1승을 챙겼다. 바둑리그 티브로드-한국물가정보 전서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30여분 뒤, 대국 개시 시각을 50분가량 넘긴 7시 20분 경 박정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국 시각 착각이 문제의 발단이었음이 이내 밝혀졌다. 오후 6시 30분 아닌 8시 30분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박정환은 집에서 여유 있게(?) 출발한 참이었다.

바둑은 대표적인 ‘질서의 게임’이다. 웬만해선 심판조차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승부라고 자랑한다. 단 2명이 마주 앉아 대화도 없이 ‘예술작품‘을 합작하는데 말썽이 끼어들 소지가 전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잔잔한 호수 같은 반상(盤上)에서도 이런저런 사고(事故)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승부의 열기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그 빈도 또한 증가하는 추세다.


바둑판 위에서의 사고 가운데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분쟁의 소지가 상대적으로 가장 적은 사고 형태가 기권패다. 현장 부재(不在)의 객관적 정황을 무슨 방법으로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현장에 나타나지 않은(또는 못한) 사연은 다양하다. 박정환-백홍석 전 기권패 사태가 벌어졌던 광복절 바로 전날, 신안천일염 소속의 김주호도 킥스 윤준상에게 기권패를 당했는데 이유는 박정환과 전혀 달랐다.

김주호는 그 대국 바로 전날 허리 수술을 받아 대국장에 나오지 못했다. 며칠 만 여유가 있었더라도 소속팀 감독은 다른 기사를 대체 기용했을 것이고, 김주호도 무조건 1패를 추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주호의 허리 고장이 가져온 억울한(?) 패배는 1패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 이튿날에도 잡혀있던 또 다른 대국까지 희생된 것이다.


김주호는 바둑리그 퓨쳐스게임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8월 15일 유병용과 대국이 예정돼 있었는데 이 판마저 포기가 불가피했다. 연 이틀 소중한 대국 기회를 날리고 2패를 안은 김주호로선 자신의 허리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환의 ‘시간 착각 결장’을 포함해 2015년 8월 15일 광복절은 2판의 기권패가 발생한 희귀한 날로 바둑사에 기록될 것이다.

2015년 벽두인 1월 16일엔 이세돌이 ‘시즌 1호 기권패’를 당하면서 올해 우리 바둑계의 ‘반상 사고 러시’를 예고했다. 제33회 KBS 바둑왕전 패자 4회전을 치르러 나온 안성준의 앞자리에 앉아야 할 이세돌이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한국기원 관계자의 말이다. “대국 개시 직전까지 아무리 연락해도 전화 연결이 안 됐다. 나중에 이세돌 九단 본인으로부터 ‘캐나다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와 잠에 빠져들었다가 일어나지 못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기권패의 사유는 이처럼 다양하다. 시간 착각, 입원 또는 수술에 늦잠이 추가됐다. 여기에 ‘시위(示威)성 불참’으로 인한 기권패도 종종 등장한다. 한국기원의 무리한 일정이나 시책에 반발해 대국을 포기하는 케이스다. 올해엔 그런 경우가 없었지만 과거 이세돌이 몇 차례 그런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았었다. 조훈현도 왕위전 도전기(2001년)와 페어대회 등서 기권패를 경험해 봤다.

국제무대서도 기권패가 있다. 올해는 딱 한 판 등장했다. 대만 여성기사 헤이자자(黑嘉嘉)가 그 주인공으로, 중국 주최 국가 단체전인 제4회 농상은행배가 무대였다. 대만 팀 에이스인 헤이자자는 5월 9일 일본 후지사와(藤澤里菜)와의 일전을 몇 시간 앞두고 주최측에 대국 포기 의사를 전달했다. 급성 장염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주장의 컨디션 난조 속에 대만 팀은 결국 9전 9패를 기록하며 1승도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기권패‘란 호칭은 문제가 없을까. 한 번쯤 재점검해 볼 시점인 것 같다. 경기 자체에 대한 사전 기권(withdraw)이냐, 경기 도중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게임을 포기하는 기권(give up)이냐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격투기에선 항복(submission)이란 용어가 존재한다.

바둑에선 상대방의 중도 포기에 의해 얻는 승리를 불계(不計) 또는 중압(中押)승으로 표시하므로 기존의 기권승과 구별은 되지만, 기권(棄權)의 원래 의미로 볼 때는 후자 쪽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현재의 기권패 표현은 경기를 포기한 시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제 시간까지 대국장에 못 가 한 수도 못 두고 지는 바둑을 기권패 대신 부전패(不戰敗)로 칭하고, 두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패배를 기권패(불계패와 함께 사용)로 정리하는 것은 어떨까.


바둑 게임에서 가장 비장한 장면은 시간 초과로 패배가 결정되는 이른바 ‘시간패’다. 형세가 유리한 상황에서 시간을 넘겨 패하는 것처럼 허망한 경우도 없다. 그 옛날 사랑방 대국과 달리 현대바둑은 시간이 재산이다. 자신의 시간 관리를 잘 하는 것은 물론이고 초읽기에 몰린 상대를 최대한 ‘시간 공격’으로 괴롭히는 기사가 유능한 승부사다.

5월 28일 중국 저장성 취저우(衢州)시 대국장. 한국의 박정환과 중국 천야오예(陳耀燁) 두 숙적이 마주 앉았다. 2015 중국 갑급리그 항저우(杭州)와 베이징 간의 주장전이었다. 중국 인터넷 중계창에는 흑을 쥔 천야오예의 초시승(超時勝)이라고 떴다. 우리의 ‘시간승’이다. 상변에서 패가 발생한 가운데 천야오예가 팻감으로 하변에 단수를 친 상황에서 수읽기에 골몰하던 박정환이 마지막 초읽기 1회를 넘겨 버린 것이다.


올해 중국리그서 4연승을 달리던 박정환은 그 판을 져 시즌 첫 패배를 당했다. 수(手)에 의해 패한 것도 아니고 시간 초과로 전승 행진에 브레이크가 걸렸으니 황당했을 것이다. 이 패배는 올해 박정환의 갑조리그 전반기서 거둔 성적 8승 1패 중 유일한 1패이기도 했다. 톱스타 박정환이 기권패, 시간패 등 다양한 형태의 패배를 맛 본 해는 과거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올 바둑계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시간패는 5월 30일 바둑리그 박영훈 대 이호범 전이었다. 포석을 끝내고 중반 전투로 옮겨가는 장면에서 흑을 쥔 박영훈이 백 대마의 급소를 들여다봤다. 대국이 시작된 지 65수째였다. 1시간을 다 쓴 이호범은 50초, 하나, 둘…로 초에 몰리면서도 착점을 서둘지 않았다. 계시원이 가차 없이 불러댄 숫자는 마침내 “열”에 이르렀고 이호범에겐 시간패가 선고됐다. 바둑은 이제부터였지만 단 하나 뿐인 60초 초읽기를 날려버린 죄는 그만큼 컸다.


금년 시즌 중 시간승은 이밖에도 몇 건 더 발생했다. 2월 24일 여자바둑리그 김혜림 대 헤이자자 전, 7월 7일 제2회 몽백합배 본선 64강 변상일 대 에릭 루이 전, 4월 13일 제20회 LG배 예선 1회전 박정상 대 다케미야 요코 전, 4월 14일 같은 무대 김지훈 대 쑤야오궈 전, 6월 13일 퓨쳐스리그 김주호 대 박건호 전(이상 앞이 승자)의 승부를 가른 것은 모두 공간개념인 ‘집’이 아니고 그 대립개념인 ‘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패라고 해서 모두가 착점 지연에 의한 불상사라고 단정하는 것은 약간 위험하다. 시간을 오버하는 것이 때로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수단 가운데 하나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졌어” 또는 “(더 둘 데가) 없습니다” 란 말로 패배를 육성(肉聲) 발표했지만 요즘 그런 기사는 거의 없다. 자신이 잡아 보관 중이던 상대방 사석(死石)을 판 위에 올려놓는 방법, 계시원을 향해 눈짓하는 방법, 반상의 돌을 쓸어 담거나 돌무더기 한 쪽을 흐트러뜨린 뒤 복기로 들어가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쓰인다.

타임 오버를 자청, 시간패로 위장(?)하는 항복 방식은 승부사의 자존심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앞에 열거한 시간패 대국들 중엔 실질적으론 불계패에 해당하는 판이 몇 판 들어있을 수도 있다. 진짜 시간패인지, 시간패의 형식을 취한 항복(불계패)인지는 바둑에 패한 대국자 자신만이 안다. 이것까지 완벽하게 구분하고 그런 자료를 보존하는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


프로들의 공식 토너먼트 성적표엔 양자패(兩者敗)란 것도 등장한다. 대국 예정이던 쌍방이 모두 기권하는 경우 둘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는 반상 사고라기보다는 대국자의 자세와 관련된 태업(怠業)에 해당한다. 그 판의 승자와 다음 라운드에서 대결하게 돼 있던 기사는 한 판을 거저먹는다. (이 경우 기권승보다는 부전승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아예 대국에 들어가지 않고 패한 경우 기권패보다 부전패로 표기하자는 앞서의 주장과 연결된다).

올해 공식적으로 양자패는 모두 3판 나왔다. 3월 2일 34회 KBS바둑왕전 예선 2회전 때 P 四단과 K 三단이 모두 안 나와 윤현석 九단이 다음날 결승전에 무혈 입성했다. 3월 3일 59기 국수전 예선 2회전 때는 앞서의 P 四단과 또 다른 K 三단이 예고 없이 불참, 고근태 九단이 우두커니 앉아만 있다가 3라운드 티켓을 땄다. 같은 날 같은 대회서 민상연 三단도 H 九단과 K 二단 모두 대국을 포기한 덕에 3라운드로 직행했다.


전적표를 훑어보다가 양자패 표시를 만날 때의 심정은 많이 허탈하다. 어느 일방(一方)의 결장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쌍방 불참은 과연 여기가 프로들의 경연장인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일방이건, 쌍방이건 기권패는 기전을 운영하는 한국기원의 현장 실무자들에게도 쓸데없는 노력과 수고를 추가로 안겨주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프로의식이 가장 돋보인 기사로는 최철한 九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그는 6월 6일 다리 부상을 당한 뒤 입원과 수술을 거치면서도 단 한 판의 기권패 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부상 직후 깁스를 한 채로, 또는 휠체어 신세를 져 가면서 2주 사이 5판을 소화했다. 심지어 국수전 대국을 위해 배 위에도 올랐다. 이런 장인(匠人) 정신이 사고 한 달 뒤인 7월 5일부터 한 달 사이 무려 12연승을 질주하는 원동력으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사례들과는 조금 다른, 실제 ‘분쟁’ 케이스도 가끔 등장한다. 올해 경우엔 3월 시니어클래식 기성전 8강전서 한 차례 발생했다. 나종훈 사범과 권갑룡 사범 전에서 나종훈 사범이 “상대가 착점 후 손을 뗐다가 다시 집어 딴 곳에 두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심판장을 맡은 김인 九단은 고민 끝에 재대국을 하는 것으로 판결했고 재대국 결과 나종훈이 승리, 4강에 진출했다. 이 케이스는 기권패나 시간패, 양자패와는 성격이 다른 ‘분쟁’ 케이스에 해당한다.


아프지 않게 건강한 몸으로, 대국 기일에 정확히 맞춰 나와서 최선의 기보를 보여주는 것이 팬들에 대한 프로들의 의무다. 시간 관리 미스로 이긴 바둑을 패하고 일어섬으로써 관객들을 맥 빠지게 만드는 일도 없어야 한다. 물론 신사의 게임답게 대국 분쟁도 최대한 사라지는 게 바람직하다. 모든 프로기사가 ‘목숨을 걸고 둔다’는 정신으로 전력투구하며 페어플레이를 펼친다면 바둑의 위상은 더 높아지고 저변도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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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오늘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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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어서두소 2017/10/13(23:43)
취미가 바둑인 사람 曰(왈) : 사건, 사고, 질병으로 불참할 경우 - 증명할 수 있으면, (대회기간 일정 내에) 한 차례 연기할 수 있도록 하라. 그것은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 이것도 건전한 사회에서 전통적 게임의 법칙이다.
안뇽하시옵니까 2015/10/01(13:48)
그게...대국료가 없기 때문이지요?
네이티브앨터 2015/09/26(23:50)
과태료 내지 말라
꽃님이아찌 2015/09/25(17:24)
양자패는 정말 문제입니다..애초부터 대회에 참여를 안하던가 해야지..대회를 희화화해버리는 모양새입니다..그런 의미로 최철한9단의 자세는 더욱 훌륭해보입니다
강한남자01 2015/09/24(13:36)
으 흐흐흐흐흐흐흐흐 박백 대결에서 박정환님이 한판 접어 주셧네...크크크크크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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