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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 | [복기맨 일기] 3화. 피카소들의 바둑<농심배 제12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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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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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206 | 꼬리말: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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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TV 사무실과 5분 거리에 있는 상암동 스튜디오. 점심을 먹은 360마케팅 팀의 신입 멤버 두 명은 바둑TV 스튜디오의 견학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들을 인솔해 온 고참 선배는 오늘 방송의 성격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있었고 경청 중인 남자 신입과 달리 여자 신입은 딴청이었다. 그 여자의 시야에 잡힌 것은 나였다. 며칠 동안 안면을 익힌 나를 향해 “살 어떻게 빼죠?”라고 난데없이 물었고 평소 살을 찌우고 싶어하는 나와 일심하여 ‘합동생활’의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그때 남자 신입이 합세해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된장국 두 숟갈·설탕 한 스푼 다이어트’ 전법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 다이어트에 성공한 위인이었다. 한창 흥미진진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현욱 사범님이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사범님~!” “어! 웬일이야?” “저 복기맨해요” “아, 진짜?” 원래부터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같은 프로기사끼리의 연대감이랄까가 존재하는 것이기에 반가움은 한층 깊고 그에 따라 억양도 높이를 더한다. 그러나 격양된 감정은 순식간에 누그러지고 곧 그저 그런 안부들을 주고받는다. “해설이세요?” 오늘 정상오빠가 해설이라는 소식을 미리 듣고 온 터라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변동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 잠깐 일이 있어서 왔어” 그러고 곧 총총 사라지는 현욱 사범님. 신입들의 ‘다이어트 토론’은 이미 막을 내리고 선배의 뒤를 따라 위층 견학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나는 와이셔츠를 덧입기 위해 분장실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면 오른쪽으로 폭이 좁은 복도가 펼쳐진다. 몇 발짝 걸어나가면 왼쪽으로 대기실, 한 두 걸음 더 가면 분장실이 들어차 있다. 두 방 사이에는 메이크업을 지우는 용도일 세면대가 있고 분장실을 마주보고는 정수기가 놓여져 있다. 그 정수기를 돌면 안쪽으로 휴게 공간이 나 있다. 의자와 탁자, 벽걸이TV들로 채워진 곳이다. 복도의 길이는 대략 10미터 안팎. 유리문을 열자 하나의 실루엣이 다가들었다. 그 실루엣이 현욱 사범님인 것을 단박에 알았지만 어떤 생각에 잠긴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엔 뭔가 이상했다. 사실 그곳은 생각에 잠기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유리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그곳이고 휴게 공간의 초입으로서 애초에 의자가 놓여진 공간이다. 의자가 어떤 목적에 의해 치워져 있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사람들에게 노출이 가장 쉬운 곳에서, 자아도취에 빠진 몽상가 같은 폼으로.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실루엣은 점점 뚜렷한 형상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에도 사범님은 미동이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과 대면한 듯 초점을 종잡을 수 없었고 사람의 인기척에도 전혀 동요가 없었다. 문득 정적을 깨고 카메라의 셔터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다. 복도의 끝에 다다라 휴게 공간의 안쪽을 들여다보니 탁자와 의자가 치워져 있고 거기에 PD님이 올라앉아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알고 보니 곧 시작되는 행마법 강좌의 메인 타이틀을 찍는 작업이라고. 현욱 사범님은 나를 발견하고 황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게임 벌칙 같은 거야” 애써 민망함을 감춘다. PD님은 현욱 사범님에게 여러 각도의 포즈를 주문했고 때로는 육성으로 배경음악을 깔았다. 분위기를 만들어주려는 PD님의 재치였으나 나로서는 무척 짓궂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마치 웨딩촬영을 하듯 힘겨운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고 차마 사범님의 모습을 보기 괴로웠던 나는 종종걸음을 치며 재빨리 복도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 진귀한 장면을 놓치는 게 아까워 다시 유리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선배들이 자리를 잡고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자고 한 거 아니야” “저 이상한 PD가 기획한 거야” ‘그 이상한 PD’는 여전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그러곤 뒤이어, “세실 사범도 한 번 찍을까?” “나중에 협박하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다시 줄행랑을 친다. 현욱 사범님의 안녕을 빌며. 오늘 메인 대국은 농심배 제12국. 한국의 마지막 주자 지석이가 흑을 잡고 일본의 마지막 주자 이야마유타가 백을 잡았다. 요즘은 ‘상식을 깨뜨리는 수’를 발견하고 그 수를 판에 적용해가는 게 대세라고 한다. 특히 이번 대국에서 그런 수들이 몇 차례 나왔다.  걸치는 방향) 먼저 포석 단계. 일감은 위로 걸치는 것(백1)이다. 뒷문이 열려있는 진영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 때문에 A의 뒷문이 열려있는 상황에선 이 그림을 우선적으로 그려볼 것 같은데··· 실전1) 그러나 백은 아래쪽으로 걸쳤다. 자칫 흑돌의 효율을 극대화 시켜줄 수 있는 우려가 있으나 백은 개의치 않고 연이어 32를 선택. 흑도 상변이 더 크다고 보고 33으로 벌려나갔다. 벌리는 간격) 이때도 우선적으로 두 칸 벌릴 수 있는 곳에 갈라치고 싶다. 한 칸 벌림보다는 두 칸 벌림이 안형 면에서 더 안정적이라고 우리는 배워왔고 그렇다면 백1이 일감이다. A나 B 모두 두 칸의 간격이 나온다.  실전2) 그러나 백은 34,36으로 한 칸 벌림을 선택. 흑은 A로 바로 응징에 들어갔다.  선후수 차이) 그러고 치달은 진행. 어느 한쪽이 크게 아쉬울 것 없이 이제 일단락 지을 시점만 남아 있다. 흑1,3으로 선수를 취하고 5로 한 점을 잡는 게 상식인데··· 실전3) 81로 굳이 후수를 잡으면서 귀에 몇 집을 보탰다. 하중앙 끊긴 부분은 이로 인해 보류된 상태. 그러자 백은 A로 상변을 침입해 들어갔다.
 실전4) 이뿐만이 아니었다. 흑은 113,115를 보태주면서 백 한 점(118)을 잡는 데 집착했고, 실전5) 백은 패의 여지(130)를 스스로 없애며 135의 교환을 얻어냈다. 134…Δ 137…131
 실전6) 지나친 비약일지 몰라도 이 장면에서도 ‘의심’은 들었다. 180은 자명한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182가 준비된 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A의 선수가 듣고 있기 때문에 182가 잡힐 염려는 없다. 때문에 180의 손해를 감수하고 흑 집을 깨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면··· 그러나 이건 백의 자명한 실수였다. 집으로 만회될 게 아니었다.  백 안됨) 백1로 나가면 흑2가 기묘하다. 백이 꼼짝없이 죽은 꼴. 백은 흑2,4를 간과했을 것이다.  실전7) 물론 패착은 그 전에 있었다. 이미 흑이 약간이라도 좋은 흐름이었던 것. 실전7은 중앙과 하변이 결정된 시점이다. 백은 하변을 흑은 중앙을 선택하면서 판이 대략 정리되었으나 152와 155는 155가 더 컸다는 게 해설자의 의견. 물론 큰 차이는 없지만 역시 단 한 집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국면이므로. 어떤 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저 수를 두었다면’ 단지 방향착오고 판단미스일 수 있는 것들이 김지석이 두니까, 이야마유타가 두니까 일리가 있는 수로 보여진 것도 사실이다. ‘같은 선이라도 내가 그으면 낙서고 피카소가 그으면 예술이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이 말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다소 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난’ 수들은 결과적으로 대세에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고 국 후 연구를 통해 그 수들의 판결이 내려지겠지. 그 수들은 이미 많은 의미들을 내포한 수였을 거라고, 그저 정상급 기사들에 대한 과대평가는 아니었을 거라고, 가만히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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