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天敵 극복史

A가 B라는 특정 상대에게 유독 약할 경우 B를 가리켜 A의 천적(天敵)이라고 한다. A가 B뿐 아니라 C, D, E…등 경쟁자들 대부분에게 자꾸 진다면 그건 천적이 아니다. 그냥 A가 약한 것이다. 이런 가설(이랄 것도 없지만) 아래 김지석이 국내 최고 수준 경쟁자들과 펼쳐온 맞대결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는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

김지석은 그들 대부분에게 거의 예외 없이 열세로 출발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거짓말처럼 반격에 성공하며 천적 관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한 명, 한 명 상대전적을 살펴보기로 하자. O는 승리, X는 패배이며 시간 순으로 정렬한 것이다. 승패는 모두 김지석 기준이다.

①이세돌 상대전적

XXXXX OXXXO XXOXX OOOOO X (8승 13패)

아직 김지석의 이세돌 상대 총 승률은 38.1%로 4할이 채 안 된다. 초창기에 워낙 많이 졌기 때문이다. 데뷔 초 5연패로 시작해 2승 8패, 3승 12패로 밀리는 등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2012년 연말 이후 5연승으로 반격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기엔 국내 최고 번기(番棋) 승부 중 하나인 18회 GS칼텍스배 결승전에서의 3대0 스트레이트 승리가 포함돼 있다.

승부세계에선 99연패보다 100번째 승부서 거둔 1승에 더 가중치를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전 전적은 무의미하고 가장 최근 작성한 전적이 가장 현실에 가까운 데이터란 뜻이다. 물론 둘 간의 마지막 대결(2013년 11월 바둑리그)에선 이세돌이 이겼지만, 그 직전 김지석이 거둔 5연승은 그 앞에 참담한 전적을 작성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의문이 들 만큼 눈부시다. 김지석은 저승사자 같던 이세돌을 분명 극복했다.

②최철한 상대전적

XXXXX XOOXX OXOXX XOOOO OOO (11승 12패)

이세돌을 상대한 기록보다 더 충격적이다. 김지석의 ‘환골탈태’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최철한이야 말로 한 때는 김지석에게 천적이었다. 데뷔하자마자 6연패, 16국을 겨룬 시점에 김지석이 이긴 판은 단 4판에 불과했다. 만나기만 하면 흠씬 두들겨 맞는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랬던 김지석이 2013년 3월부터 최철한에게 무려 7연승 중이다. 확실하게 칼자루를 바꿔 쥔 것이다. 승부세계에서 이런 일은 여간해선 발생하지 않는다. 선계(仙界)의 영약(靈藥)을 먹고 갑자기 2점은 세어졌다는 식의 만화에서나 가능한 스토리다. 물론 최철한이 다시 물줄기를 바꿔 예전의 연승 모드로 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까지 김지석이 최철한을 상대로 연출 중인 뒤집기 스토리는 불가사의에 가깝다.

③이창호 상대전적

XXXXO OXO (3승 5패)

표본이 많지는 않지만 추세는 앞서의 예들과 흡사하다. 초창기 일패도지, 후반기 주도권 장악의 패턴이 여기서도 이어지고 있다. 보통 첫 만남부터 4연패쯤 하면 실력 차가 드러난 것이고, 심리적 부담감으로 위축되다 보면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게 마련이어서 이런 식의 추격은 거의 불가능한 법이다.

반격의 시점은 2009년 8월부터였다. 최근 몇 년 사이 이창호가 부진, 같은 시기 정상권으로 발돋움한 김지석과의 대결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최근 1~2년 사이 둘의 활약상을 볼 때 대결이 많이 성사됐더라면 상대전적이 역전됐을 가능성도 컸다. 만약 이 추론이 맞다면 김지석은 이창호란 또 한 명의 ‘천적’으로부터도 탈출에 성공하고 있다.

④강동윤 상대전적

XXXOO XOXOX OOOOO X (9승 7패)

어렸을 때부터 동갑 라이벌 관계였던 강동윤에게도 김지석은 앞서 상대들과 매우 흡사한 사이클을 그리고 있다. 2012년 7월부터 2013년 10월 사이 작성한 5연승이 결정타가 되면서 통산전적을 기어이 역전시켰다. 이쯤 되면 김지석의 초창기 부진은 낚싯밥 같아 보인다. 바둑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석(捨石) 전법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 둘의 관계도 더 두고 보아야 한다. 가장 최근인 2014년 10월 대결(바둑리그)서 강동윤이 연패에 브레이크를 걸면서 흐름이 또 한 번 요동쳤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으로 김지석이 강동윤 마저 천적 리스트에서 일단 제거한 것은 분명하다.

⑤조한승 상대전적

XXXXO OOOO (5승 4패)

결정판이다. 판 수는 많지 않지만 초창기 때 일부러 만만하게 보이기 위해 실컷 져주고(?) 뒤에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는 수법을 이 승패표가 증거물인 양 제시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두 승부사의 연령 차이에서 오는 전성기 이동(移動)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김지석도 새해로 26세에 접어들지만 조한승보다는 7살이나 젊다. 김지석이 조한승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둔 것은 2011년 바둑리그였고 2014년 GS칼텍스배 8강전서 대세 역전을 이뤘다.

⑥박영훈 상대전적

OOXXOOXOXOO (7승 4패)

박영훈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다. 김지석은 다른 정상권 경쟁자들과의 대결과 달리 박영훈과의 만남에선 초반부터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지금까지 통산 7승 4패로 앞서나가는 중이다. 지난해 10월과 12월 천원전, 국수전서 승리하면서 간격이 약간 벌어졌다.

⑦원성진 상대전적

OOXXOOXX (4승 4패)

박영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둘은 비교적 사이가 좋은 관계다. 유심히 보면 OX(승패)를 주고받은 패턴이 김지석 대 박영훈 카드와 비교해 놀랄 만큼 흡사하다. 혹시 같은 ‘송아지 띠‘라고 같은 대접을 했을 리는 없고…

⑧박정환 상대전적

XXOOXXXXXXXOXXXXXOOXX (5승 16패)

마침내 박정환까지 왔다. 그는 김지석이 아직 극복하지 못한 유일한 천적이다. 21국을 두어 고작 5승, 승률 23.8%로 네 판 중 한 판 꼴로도 못 이겼다. 그 어떤 천적의 고택(古宅)도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 천적의 비밀의 장벽을 허물었던 김지석이 유독 박정환 앞에서만은 신통력이 듣지 않고 있다.

이 글에 등장한 상대기사들 명단을 유심히 살피면 나이라는 중요 변수가 큰 역할을 하고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강동윤만이 동갑나기일 뿐 나머지 상대들은 모두 김지석에겐 선배들이었다. 오로지 박정환만 후배다. 올해로 김지석이 스물 여섯, 박정환은 그보다 네 살 아래다.

2014년 한국 바둑계의 양대 주역이었던 둘은 새해 2월부터 세계대회인 19회 LG배를 놓고 건곤일척의 결승 3번기를 갖는다. 지난 연말 그 전초전으로 벌어졌던 국수전 도전자 결정전서 김지석이 1승 2패로 역전패 당한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하지만 이번 결승전 결과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다. 김지석의 천적 극복기에서 이번 LG배 결승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이냐, 용두사미(龍頭蛇尾)냐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