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환 / ●김지석 (14.12.18)

수순은 더디게 진행됐다. 랭킹 1,2위의 대결이니만큼 그럴만한 것이겠지만 관전자들은 지루할 따름이었다. 대화창엔 연신 수순이 느리다는 유저들의 원성이 들끓고 있었다. 대국시작 열 시부터 점심시간 한 시까지 진행된 수순은 고작 86수. 두 시부터 대국이 속개된 이후 종료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또 다시 세 시간. 총167수가 두어지기까지의 여섯 시간은 유저들이 충분히 지루함을 느낄만한 시간이었다. 그것도 한 수 한 수 느리게 느리게. 도무지 아무렇게나 두어도 될 것 같은 국면 속에 무슨 할 생각이 그리도 많은지, 그 깊은 속내를 알아차리기엔 랭킹 1,2위의 대국은 너무나 심오했다.

  복기맨들은 측면에 구비된 노트북을 힐긋거리며 고요히 수순을 따라가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 안에는 바둑 사이트의 창이 열려 있다. 그 사이트에 착점되는 수순에 따라, 그러니까 인터넷으로 대국을 관전하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국을 보며, 마주하고 있는 바둑판에 돌을 놓아 간다.
  오늘 같이 한정 없이 긴 대국일 경우 멍~하니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물론 헤드셋 너머 PD님의 지시사항과 화면에 새로운 수가 놓여졌는지를 의식해야 한다. 또한 수와 수 사이의 간극이랄지 해설자의 해설과 자연스러운 흐름 등에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도 위험하다. 은연 중에 내가 예측하는 다음 수에 돌을 놓아버릴 위험도 있을 것이므로. 그러니까 적당한 몰입이 중요. 바로 이럴 때 스마트폰으로 각종 정보를 습득하거나 가벼운 내용의 책을 읽거나 하는 등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실은… 단지 소극적이고도 원대한 일탈일 뿐이려나? 뭐 어쨌거나.

  146수에서 지석이의 장고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수를 놔두고 뭘 고민하지?’ 의문을 금할 순 없었지만 감히 랭킹 2위의 수를 헤아릴 처지는 못되었다. 그저 무릎 위에 놓아둔 인쇄물의 장을 조심조심 넘겨가며 읽고 있을 때 돌연 상대 복기맨이 다급하게 손짓한다. 순간 위험을 직감한다.
“수순 잘못됐어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아뿔싸! ‘내가 뭘 잘못했지?’ ‘큰일났다!’ 어찌할 바를 몰라 입만 떡 하니 벌리고 있는데 상대 복기맨이 수습에 들어간다.
“감독님, 수순 잘못됐어요”
“140수로 빽 했어요”
헤드셋 마이크에 대고 조곤조곤. ‘휴, 내 실수가 아니었네’ 안도한 나는 황급히 해설자(박정상9단)에게 다가가 팔을 마구 휘저어댄다.
“수순 잘못됐어!!!!!＼@0@／“
마치 ‘침묵의 공공칠빵’처럼 모든 것들이 조용하고 분주하게 흘러간다.

[의문의 수순]

140~146. 이해불가한 영역이었다. 백138로 두 점Δ을 살리는가 싶더니 돌연 140으로 손을 돌린다. 너무 나태한 거 아닌가. 흑은 곧장 [1도] Δ로 중앙 백을 제압해 상대의 나태함을 꾸짖어야 할 터. 그런데 태평하게 141로 받아둔다. 이후 다섯 수를 더디게 나아가더니 146에서 정체. 여기서도 A로 단수친 뒤 B로 연결하는 게 당연하다. [2도] 흑1,3은 백4로 불가. 이런 곳에서 심연의 시간을 기울이고 있다니···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혹시 랭킹 1,2위만이 생각할 수 있는 바둑판 위의 다른 시공간이 있는 건 아닐까?


    
[1도]                                                      [2도]

[실전진행]

그런데 그 모든 게 오해였다. 인터넷 중계자가 호구의 위치를 잘못 파악하고 수순을 찍은 것. 백140이 원래 두어진 수로 호구의 위치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때는 141로 받는 게 정수. 보강을 생략했다간 A로 끊겨 피해가 막심하다. 146에서의 정체 또한 중계자가 실수를 알아차리고 시정하는 데 들인 시간이 속해 있으리라.
  이제서야 모든 게 납득이 간다. 동시에 허탈해졌다. 해설자는 줄곧 잘못된 호구 지점에 의문을 내비쳤고, 어떤 이는 ‘다른 시공간’을 의심했으며, 관중들은 제각기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모든 시간들이 긴장된 채 고요하고도 느리게 흘렀던 것이다. 그 시간들이 모두 오해였다니 말이다.

  급히 광고가 내보내졌다. 광고가 나가는 20여초 동안 잘못 진행된 수를 바둑판과 해설판에서 들어낸다. 관전자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화창은 갑자기 시끌시끌해졌다.
“수순이 갑자기 바꼈네”
“방송 사고네”
“티비가 잘못했네”
“어떻게 된 건가요?” 
빠르게 올라오는 댓글들 사이로 몇몇 댓글들이 포착됐다. 대부분 의아한 반응이었고 TV도 인터넷 중계를 보고 착수하는 중임을 모르는 유저들의 원성도 이어졌다. 광고가 나간 뒤 해설자는 곧바로 시정된 사항을 시청자들에게 알리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바란다”고 양해를 구했다. 

  다시, 느리게 수순을 이어갔다. 언제인지 모르게 언제 역전을 했는지도 모르게 지석이는 이겨 있었다. 이런 것이 고수들의 기묘한 면이 아닌가 싶다. 크게 이득을 챙긴 것도 상대가 딱히 실수한 것도 없는데 역전이 돼있는 것. 정환이는 패배를 예견하고 스스로 조금씩 자멸해간 듯 보였다. 그리고 던질 지점을 찾았다는 듯 투석.

[패착]

  해설자는 94로 어깨짚어 상변을 삭감해간 과정보다 하변을 차지한 수(111)가 더 크지 않았을까라고 정환이의 패착을 조심스레 되짚는다. 나로서는 암만 봐도 모를 일이다. 그 미묘한 차이, 사실은 누구도 확언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차이가 바둑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보면 바둑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아득함을 느낀다. 어찌됐든, 지석이는 정환이에게 선승을 거두며 도전자의 자리에 성큼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