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법은 전염되나 - 감성도 전염된다

자문자답해 본다.

반상은 즐거운 곳. 그런 즐거운 곳에서 우린 무어하고 노나.

그냥 잘 논다. 노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 놀이의 연원이 그에 있는 거 아냐?
 

중얼거리기도 한다. 20세기 이전 중국의 바둑을 살펴보면 참으로 의심쩍은 현상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리곤 중얼거린다.

“이거 문화처럼 전염되는 거 아냐? 수법이란 게 말이야. 아니, 수법이야말로 문화현상의 하나이니, '문화처럼‘ 그런 표현 할 필요도 없는 거겠지.”

1도(청나라 때의 4점 접바둑)

중국 청나라 때의 대국으로 흑을 잡은 서성우는 아직 국수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예전에 본 이 두 양반의 바둑은 솔직히 짜증이 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수법을 많이 쓰고 있었다. 이거 뭐 감정 싸움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 투정 들게 하였다.

이 바둑도 별로 차이가 없다.

초반을 잠깐 보자.

흑2를 보자. 상대의 밑을 훑어가는 저런 수가 중국 바둑에서는 많이 쓰였다. 상대를 감정적으로도 약 올리게 만드는 그런 기분을 안겨준다. 그리곤 두점 머리 때리고 또 받아치고, 어지러워 정신이 없다.

하도 복잡해서 백11 이후는 흑A부터 알파벳으로 정리했다. (백 黃龍士 흑(4점) 徐星友)

2도(3점 접바둑 - 혈루편 중의 하나)

3점 접바둑은 이와 같이 대각선으로 흑돌을 배석했다.

앞서의 두 대국자 바둑이다.

보시라.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싸움 바둑의 진수라 할 만하다. 관념의 힘을 실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상변 백21은 어떠신지?
 

3도(3점 접바둑 - 2도 다음)

2도 다음이다. 백18을 보시라.

저렇게 말도 아니 되는 수를 둔다!

흑이 가볍게 한 칸 H에 두면 아무런 수도 아니 된다. 손해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는지? 흑이 A에 붙여 백H까지 진행이 되었다. 축이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그것 참! 얼마나 감정적으로 바둑을 두었기에!

아직까지 전해진다. 그들의 감정이.

돌 놓는 소리 없어도 돌의 자취만으로도 충분히 감정이 전달될 정도니, 큰 승부를 결하는 명인 국수들의 감정과 내면이야 그 얼마나 신랄할까!

놀이로서의 바둑

대국 후 수 백 년이나 지난 뒤에 감상해도 이리 감정이 상(傷)하니 과연 바둑이란 게 묘하다 못해 기이하다. 왜 그럴까.

그 이유의 하나는 바둑이 놀이의 속성을 깊이도 간직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놀이의 속성 중 하나는, 그 놀이의 세상이 비현실적인 세상인 점에 있다. 현실과 유리된 세계. 그 속에서 우린 현실을 잊는다. 그 놀이가 제공하는 울타리 속에서 우린 현실의 모호하고 무의미한 불안을 잊는다. 우린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린 그 질서 속에서 우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자, 그러나 놀이의 속성만으로 바둑을 규정하면 자칫 공허한 뼈대만 내세우고 현실감 높은 피와 살의 세계, 이 풍성한 세상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겠다.

1) 바둑은 대국자 간에 감정이 쉽게 교류되는 세상이다.

1990~97년까지의 대국을 조사한 표1이 그를 실감나게 한다.

표1. (소비)시간과 제한시간의 상관관계(제한시간 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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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의 시간     제한시간

흑의 시간     0.58          0.31

백의 시간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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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의 시간소비가 제한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보다 백의 시간소비에 의해 결정되는 비율이 두 배나 된다. 제한시간보다도 서로의 반응이 중요한 것이다. 상대가 장고하면 나도 장고하고... 상대가 빨리 두면 나도 덩달아 빨리 두고….

아 참. 누구의 바둑을 조사한 것인가.

조훈현ㆍ서봉수ㆍ유창혁ㆍ이창호.

당시 가장 실력이 출중했던 네 분 기사가 서로 간에 둔 바둑을 모았다. 모두 합해서 507국이던가. 대략 그랬다.

2) 서로가 비슷한 세계관 속에 들어가 있다.

바둑에서도 패러다임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것을 우린 잘 안다.

가까운 예로 1930년대의 신포석 혁명은 중앙과 공간을 중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엔 우리 모두 세력과 두터움을 잘 이해한다. 그리고 그 두터움의 질감도 감성적으로 갖고 있다.

일종의 감성적 기체(基體)를 갖게 된 것인데 - 특정의 문화가 창조 유지 발전되기 위해서는 그 문화에 필요한 구체적인 감성이 창출되어야 한다 - 바로 그 때문에 우린 서로 간에 감성적인 공감대를 갖게 된다.
 

당연히 감정은 전염된다. 대국시의 감정 뿐만 아니라, 수법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는 감성적 질감(質感)도 공유한다.

두터움이란 무엇인가.

앞서 어느 글에선가 이리 밝혔다.

세모와 네모를 볼 때 우리가 얻는 감정.

세모를 보면 테두리가 쳐지기에 우린 안정감을 얻는다.

그 안정감을 우린 ‘두텁다’고 표현한다.

형상의 기호학이라 할까.

상대에 대한 기사들의 반응은 솔직한 것이다

너무 딱딱한 듯하다. 논의 전개가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

사카다는 전성기 때 린하이펑을 만나 아무도 예상치 못하던 퇴조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가 보인 특별한 경험 하나는, 그의 토로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 4도 바둑을 둔 다음 사카다의 국후 첫 소감이 이랬다.

“홀렸어요.”

4도(예전의 선생은 이런 수 아니 두었는데)

『명인전 전집』보면 이런 얘기 있다.

오다케가 놀라면서 말했다. “웬일일까. 예전의 사까다 선생은 이런 수는 안 두었는데... .”

대기실의 기사들도 흑1 흑3을 보고 정말이냐면서 패착으로 시인하고 있었다. 소위 속수였던 것이다.

“엣? 정말 이렇게 두었어, 이상한데, 이것으로는 이상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그리 말했다.

이후 수순은 알파벳인데, 흑1은 상대의 단수를 잇게 해주는 위축된 수였던 것이다.(제5기 명인전 제1국. 백 名人 林海峰 흑 9단 坂田榮男)

그러나 그런 사카다는 또 다른 기사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자 불안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와 두는 상대는 종종 사카다의 승부끼에 눌려 “귀기(鬼氣)의 사카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5도(대비와 같은 수를 태연히 두는 상대)

물론 린하이펑은 또 이시다를 만나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대비(大飛).

이름만 들어도 신비로운 인상 온다. 여기 백3이 바로 그 수로 이후는 알파벳순이다.

우칭위안은 해설하기를, 백3과 같은 수를 중국에서는 대비(大飛)라고 불렀다 했다.

큰 승부에서 태연하게 검증되지 않은 수를 만날 때, 당혹감은 불안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수를 만나서 자꾸만 깨지다 보면. (1973년. 백 8단 石田芳夫 흑 명인 林海峰)

이세돌과 대국했던 기사들은 어떨까. 반상을 흔드는 이세돌의 바둑 스타일에 대해 많은 기사들이 반상의 난해함을 접할 것으로 짐작한다. 뭔가 아귀가 아니 맞는, 합리적으로 이해가 아니 되는 상대와 둔다는, 그런 인상 접했다.

물론 천적이 있다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주제가 아니다.

초점은, 감성과 수법은 쉽게 상대에게 전염된다는, 그 현상에 대한 약간의 분석과 이해, 그것이다.

수법과 감성은 별개로 오지 않는다

“불안의 반복” 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문제를 다시 돌아보도록 하자.

린하이펑을 만난 사카다도 그렇지만 이시다를 만난 린하이펑도 다음 현상 겪었을 것으로 본다.

하도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지니까…

대국 중에 - 형세가 유리해도, 아니 유리한 그 순간에 - “아, 또 어찌 되는 거 아냐?” 그런 심리 온다. 불안의 일종인데 이리 되면 자신의 리듬은 사라진다. 그러면 불안은 더 자주 더 크게 온다. 그리 되면 반상에서 지난 번에 실수하고 당했던 그런 수만 자꾸 눈에 보인다.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더욱 의식된다.

왜냐. 그 불안이 그만 컴플렉스가 되어서 그러하다.

버리고 싶었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의 뭉치에 또 걸린다.

곧 좌초되는 시간이 온다. 스스로 그 컴플렉스에 걸려서 그러하다.

벗어날 답이 없지 않다. 문제가 있다면 왜 해결책이 없겠는가.

그 하나는, 자신이 그런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을 냉정히 응시하는 것이다.

자신의 조건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해결책이다.

불안의 고유한 해결책은 응시하는 것뿐이다.

후지사와의 말씀 중에서 “대국하고 있는 상대를 공경하라.”는 겸사(謙辭)도 이제 이해된다. 왜냐하면 상대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은, 그 뒤안에 상대를 무시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컴플렉스란 스스로 만든 덫이다.

6도(상대를 지나치게 존중해도 내면과 수법은 무너진다)
상대를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호응하는 것도 콤플렉스를 가져온다. 조치훈의 회고를 듣자.

“흑2 흑4로 중앙이 두터워져 나쁘지 않다. 백5, 7엔 놀랐다. “아! 이렇게 두는 것이구나.”

하고 감복했다. 원래 손해수단이기에 더욱 감복했다.

秀行 선생도 이로써 두텁다고 자신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돌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흑이 단연 우세하다. 그런데도 대국 중엔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형세가 유리한데도 마치 불리할 때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2국은 나의 졸작으로서 완패했다.

왜 이와 같이 홀로 씨름을 해야 했던가. 그것은 근본적인 판단에 그 원인이 있었다.

백5, 7에 대하여 나는 까닭 없이 감복했다. 감복이 지나친 것이다. 물론 두텁다.

그러나 손해수단이므로 고맙게 여기면 된다. 그럼에도 상대의 좋은 면, 강한 면만 보인다. 그래서 형세불리라고 오인을 해 버린 것이다."

참고로 흑12 다음 진행은 알파벳 순서이다.(8강전 결승 제2국. 백 藤澤秀行 흑 趙治勳)
 

다음 이야기도 조치훈이 했다.
 

당시 이시다씨는 절정기였다.

이 무렵(1974) 나는 “기도”지의 좌담회에 불려나가 이런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모두들 제풀에 떨고 있는 게 아닐까요?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렇게 떨지 말고, 져도 본전이라 생각하고 두면 그렇게 차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지도 않아요. 이제부터는 당연히 무너지지 않을까요.”

7도(내기 바둑에서는 기백이 첫째)

시미야라는 내기바둑꾼이 있었다. 천하의 누구라도 2점이면 이긴다고 자부했다(天下二目). 실로 대단한 기백이요, 기량이었다.

흑1은 그냥 2에 젖혀 살면 무난하다. 좌변도 흑이 선점하고 있으니.

그러나 장래의 명인에게 사석작전을 펼치는 이 기백을 보라.

흑9 다음은 알파벳 순서가 실전이다.(1820년. 백 丈和 흑(2점) 四宮米藏)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한다. 내기꾼은 조와의 기량과 도량에 놀랐고, 조와도 상대의 기백과 실력을 인정했다. 조와는 책 『국기관광(國技觀光)』(1826)에 내기꾼과 둔 바둑을 고스란히 실었다. 11국. 빅이 있어 10번기가 11국이 되었다.

말년의 시미야가 가진 호(一生軒無案)를 보면, 비록 내기꾼이지만 그의 안목과 자부심을 짐작할 만하다.

8도(반상엔 감성과 논리만이 지배)

그러하다.

반상엔 수법의 감성과 수법의 논리만이 있다. 그것이 반상을 지배한다.

흑1은 예리하다. 다음 알파벳을 노린 것. 스승 앞에서도 반상의 논리는 수법의 감성 불러일으킨다. (1820년. 백 本因坊 元丈 흑 本因坊 丈和)

1974년 신당동의 2층 기원에서 어느 유명한 내기바둑꾼이 바둑을 업으로 삼고자 했던 고교생 세 명에게 말씀하셨다.

“내기바둑 하지 마라. 바둑의 (품)질 다 버린다.”

내기의 전염성은 정말이지 높은 듯하다. 말이 필요 없겠다.

9도(평생의 도전자에게 이길 때는)

11살이 어리지만 뒷날의 인세키(幻庵因碩)은 조와에게 평생의 호적수요, 라이벌이었다.

그는 명인이 되고자 했던, 그리고 되고 난 다음의 조와에게 숙적이었다.

그의 실력을 보여주는 수가 흑4이다. 이로써 백을 잡았다. 만약 흑4를 A에 두면 백B 흑C 백4 흑D 백E까지 패가 된다. 여기서는 냉정했다.(1812년. 백 丈和 흑(2점) 服部立徹)

10도(1선에 8번 기게 만들다)

이름은 다르지만 8도에서 흑을 잡은 인물이 여기서는 백을 잡았다.

그런데 1선으로 계속 밀리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을 연출했다.

100국 가까운 대국 중 가장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대국이 되었다.

조와에게는 자랑이었겠다. 수법에 감정이 실린 것을 알겠다. 던져도 될 텐데 던지지도 않고.

뒷날 인세키가 전성기의 기량을 발휘할 때에는 조와가 대국을 피했다.

이미 명인이 된 다음이기도 하거니와,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전략을 발휘한 것이다.

그것이 또 인세키의 화를 돋우었으리.(1822년. 백(先相先) 安節 흑 丈和)

전염.

이 무서운 단어. 바둑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번 넘어서지 못하면 영원히 못 넘어선다. 타이틀도 쟁취해 본 사람만이 다시 쟁취할 수 있다.

그렇다. 심지어 패배의 전염도 조심해야 한다. 왜냐.

자꾸만 져서 패배가 일상화되면, 그 패배감으로 인한 상실감을 피하기 위해 공(空)과 허무감의 혼동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패배하는 인생을 삶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도 있다.

가면극에서 가면을 쓰게 되면 자신의 현재가 현실이 아님을 알아도 가면의 인물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같이. 최면술이 가능한 이유의 하나로 기대 행동 효과가 있는 것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