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대 조치훈, 올드팬들의 황금카드

조훈현은 올해 61세, 조치훈은 58세다. 두 사람의 대좌(對坐)를 고대하는 바둑 팬들의 숫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박정환 대 김지석 전이나 이세돌-구리 10번기 등에 쏠리는 관심보다 결코 작지 않다. 노년층이 젊은 층보다 많은 동호인 분포 때문일까. 그런 면도 있겠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조훈현 조치훈, 이른바 ‘양조’가 20세기 세계바둑계에서 짝을 찾기 힘든 한국 출신의 영웅커플이란 점이 더 클 것이다.

각자 따로따로 뛰어난 재주를 가진 것만으론 황금카드가 되기 힘든 법이다. 공통 요소 외에 대립 요소가 또한 뚜렷해야 라이벌로 인정받고 흥행도 보장된다. 이 점에서 조치훈과 조훈현만큼 어울리는 지구상 라이벌 커플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지역과 시대, 분야를 통틀어 그렇다. 거의 동시대에 태어난 둘은 한 평생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눈부신 신화를 쌓으면서 세계 바둑지도를 함께 새로 그려왔다. 하늘이 주유(周瑜)와 제갈량 아닌 2명의 제갈량을 인간세계에 내려 보낸 격이랄까.

두 사람의 인생 이력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할라 치면 그 충일(充溢)한 컨텐츠, 우열을 가리기 힘든 팽팽한 경력 앞에서 새삼 전율하게 된다. 한 사람은 한국, 또 한 사람은 일본 바둑계의 기록을 집대성한 총서(叢書)다. 조훈현이 9살 세계최연소 입단 기록을 지니고 있다지만 조치훈도 세계바둑의 메카였던 일본 최연소 입단기록을 40년 넘게 보유했다(2010년 여류 후지사와 리나에 의해 깨짐). 통산 타이틀 수는 조훈현이 159개, 조치훈이 73개인데 각각 한국과 일본의 최다기록에 해당한다.

조치훈의 통산 네 차례 대삼관(大三冠)은 일본 바둑계에서 영원히 재현되기 힘든 대기록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것은 조훈현의 3번에 걸친 전관(全冠) 기록으로 충분히 상쇄된다. 조훈현은 1980년 9관왕, 82년 10관왕, 86년 11관왕을 기록했었다. 더 숫자를 불리지 못한 것은 그게 그 당시 타이틀 총 숫자였기 때문이다. 조훈현이 단일 타이틀 세계 최다연패(패왕전 16연패) 기록을 들고 나온다면 조치훈도 최고(最古) 타이틀전 본인방의 10연패(일본 최장기록)로 대응할 것이다. 어떤 항목을 들이대도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대립 요소도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두 사람은 한국 바둑의 오늘을 이끈 쌍두마차였지만 주 무대는 한국과 일본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이러다 보니 두 사람은 종종 한국과 일본바둑의 상징으로 통하기도 했다. 일본서 함께 보냈던 시절에도 한 쪽은 기타니(木谷實), 또 한 쪽은 세고에(瀨越憲作) 문하였다. 두 사장(師匠)이 후학 육성에 경쟁 관계였던 양대 거장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여러 절묘한 조화가 두 사람의 ‘패키지’ 상품가치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름 석 자 중 두 자가 같은 천재 두 사람을 같은 시대 비슷한 지역에 내려 보낸 바둑 신(神)의 장난기에 웃음이 나온다.

과거 한때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던 프로복싱에서도 ‘황금 라이벌전’은 최고의 구경꺼리였다. 가장 시끌벅적하게 장안의 화제를 불러 모았던 대결이 홍수환 대 염동균 전이었다. 둘은 동갑에다 똑같이 세계무대를 넘나드는 강타자였으며 체급대도 같았다. 첫 대결은 두 복서가 27살이었던 77년 벌어졌으니 둘 모두 기량이 절정일 때였다.

이 경기서 판정승한 홍수환은 5개월 뒤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4전 5기’ 신화를 창조하며 두 번째 세계 왕좌에 올랐다. 두 기린아는 80년 연말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결을 펼쳐 무승부를 기록했다. 복싱계에는 지난날의 지명도를 악용한 ‘퇴물 대결‘이 종종 치러졌었지만 홍수환-염동균 간의 두 차례 대결은 두 선수 모두 거의 전성기를 달릴 때 이루어졌다. 흥행적으로도 두 번 모두 대박을 쳤다.

7~80년대 국제 복싱계에선 로베르토 두란, 슈거레이 레너드, 토머스 헌즈, 마빈 해글러 등 비슷한 체급대의 당대 최고 천재복서들끼리의 대결을 몇 차례나 우려먹으며 복싱 황금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흥행에만 매몰되다 보니 심심치 않게 ‘노추(老醜)’ 라이벌 대결이 벌어지기도 했다. 두란은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며 51세까지 링에 섰는데, 레너드와 3번째 대결을 펼칠 당시 둘의 나이는 각각 38세와 33세였다. 이 대결은 복싱 역사에서 최악의 ‘노인정(老人亭) 매치’로 기록된다.

그렇다면 이순(耳順)을 넘긴 조훈현과 조치훈이 격돌해도 혹시 ‘노인정 매치’란 소리를 듣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요즘에도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조치훈은 지난 7월 벌어진 제4회 마스터즈 컵 제패로 통산 우승회수를 73회로 늘렸다. 50세 이상, 7대 타이틀 우승 경력자만 출전하는 이 대회 4년 간 2번 우승했으니, 마스터즈 컵이 존속하는 한 조치훈의 일본 최다타이틀 기록은 끝없이 경신될 것만 같다. 조훈현의 한국 시니어 무대 독점비율은 조치훈보다 더 높다. 네 차례 대주배서 2번 우승을 거머쥐었고, 지지옥션배에선 해마다 젊은 여성 기사들을 혼내주고 있다(공교롭게도 올해만 예외였다^^).

둘은 물론 세계 정상을 겨냥하는 최일선 승부사들은 이제 아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검(劒)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젊은 강자들도 두 사람에게 심심치 않게 당한다. 또 한 가지 인정해야 할 것은 바둑은 복싱 같은 육체스포츠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바둑의 30세와 복싱의 30세는 비슷하지만 바둑의 60세와 복싱의 60세는 완전히 다르다. 조치훈과 조훈현이 함께 한 자리는 천상의 화음이 2중창으로 울려 퍼지는 콘서트장이다. 두 거장은 아직 늙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양조’가 마주 앉는 것은 딱 지금이 적기(適期)다. 몇 년 더 지나 70줄에 들어서면 두 사람이 지닌 신비감은 퇴색할 것이다. 혹시 맞대결이 성사되더라도 영롱하던 비색(秘色)은 빛을 잃고 ‘노추(老醜)’란 비아냥이 나올 것이다. 제한기전이긴 하지만 아직도 타이틀을 척척 건져 올리는 두 사람의 표정은 젊었을 때와 똑같이 자신만만하다. 흥행효과를 장담할 수 있다. 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은 침체된 한 일 바둑계에 상당한 활력소가 될 것이란 점이다.

조훈현과 조치훈은 지금까지 열 번을 싸웠지만 2003년 이후엔 11년째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 간의 승부사(史)에서 둘은 서로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일단 두 사람의 통산대결 전적부터 표로 살펴보자.

◇조훈현-조치훈 통산전적

일시	장소	대국명	승자	결과
80.12.31	소공동롯데호텔	조치훈귀국환영기	조치훈	흑 3집반
81.1.2	KBS스튜디오	조치훈귀국환영기	조치훈	백 5집반
92.8.20	도쿄NHK	4회 TV아시아	조훈현	흑 불계
96.6.27	소공동롯데호텔	1회 LG배	조훈현	흑 1집 반
97.6.29	소공동롯데호텔	2회 LG배	조훈현	흑 불계
00.4.10	도쿄 일본기원	13회 후지쓰배	조훈현	흑 불계
00.6.15	서울인터콘호텔	5회 LG배	조훈현	흑 불계
01.6.14	서울인터콘호텔	6회 LG배	조훈현	흑 불계
02.5.2	서울인터콘호텔	7회 LG배	조훈현	백 불계
03.10.16	해운대그랜드호텔	8회 삼성화재배	조치훈	흑 불계

조훈현 기준으로 7승 3패다. 절대 열세를 기록 중인 조치훈으로선 재격돌에 대한 열망이 조훈현보다 더 강할 것이다. 한때 7연패를 기록한 것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에게 평생 5할 미만의 승률을 안겨준 기사가 몇이나 되겠는가.

묘한 것은 조훈현으로서도 마냥 통쾌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처음 마주쳤던 80년 말~81년 초 2연패의 쓰라림을 아직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조치훈은 바둑의 본고장 일본에서 최고 타이틀 명인을 따고 훈장을 받으러 금의환향했었다. 그 조치훈에게 조훈현은 1인당 5시간짜리 첫 판에 이어 30분씩 주어지는 TV 속기 대국까지 두 판을 연속 패했다.

당시 바둑 월간지의 특집기사 제목은 첫 판이 “조치훈이 더 센가?”였고, 다음 페이지 2국 제목은 “조치훈이 더 센가보다”였다. 두 대국자는 당시로선 입이 딱 벌어질 만큼의 거액인 800만원씩의 대국료를 받았는데, ‘특별 사례’란 명목으로 조치훈에게 300만원이 추가 지급됐다. 그런 저런 상처 탓이었는지 조훈현은 그 직후 국내무대에서도 서봉수에 왕위를 내주는 등 한 동안 후유증을 겪었다.

‘일본 명인 대 한국 전관왕’이란 슬로건 아래 치러진 당시 두 차례의 조-조 대결은 흥행 면에서도 최고였다. 특히 조치훈은 가는 곳마다 사인 공세에 시달렸고 선물 공세에 파묻혔다. 첫날 대국은 대형 기반(基盤) 해설에 하루 종일 구름 관중이 모였고, 이틀 뒤 TV대결 때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원래 4개의 대형 신문사가 주최권을 놓고 경합하다가 1국은 동아일보와 1000만원, 2국은 KBS와 2000만원에 계약했다. 한국 바둑역사상 최고의 거액이었다.

두 기사는 팬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서로 날 선 얼굴로 대립하고 경원하는 사이가 아니다. 자리가 마련되면 피차 선후배의 예를 최대한 갖추면서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는 사이다. 80년 연말 조치훈이 금의환향했을 때 조훈현은 그의 귀국을 영접하고 출국길을 배웅하기 위해 빠짐없이 공항에 나갔다. 첫 판 때 먼저 입장한 조치훈이 하석에 앉아 기다리자 잠시 뒤 들어선 조훈현이 ‘손님’이라며 굳이 조치훈을 상석에 끌어다 앉힐 만큼 둘은 상대를 배려했다. 이런 관계는 이후에도 각종 국제 행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지속돼 왔다.

바둑계 일각에선 두 기사가 나란히 한일 바둑계를 정복한 시점인 83년 무렵이 양웅 대결의 적기였다며 입맛을 다신다. 조훈현이 2차 천하통일을, 조치훈은 일본 최고 타이틀인 기성(棋聖)을 품에 넣었던 때다. 하지만 절정에 오른 양국의 두 정상이 어느 한 쪽의 출혈을 뻔히 예상하면서 맞격돌 하기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정상에서 내려왔지만 여전히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현재가 오히려 최적의 대결 시점이다.

대국은 3번기 보다는 2번기로 했으면 한다. 만약 1대1이 될 경우 굳이 3국을 두어서 명암을 반드시 가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이다. 승패와 무관하게 대국료를 똑같이 균등지급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두 사람이 판이한 시간 사용법을 구사해온 점을 감안해 한 판은 1인당 1시간 이내의 속기, 또 한 판은 3~4시간의 넉넉한 제한 시간을 부여하는 게 알맞아 보인다. 치수야 물론 호선이다.

당사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아마도 선뜻 오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열쇠는 어떤 대국 조건이 제시되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평생 쌓아올린 레전드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 거장의 부담감을 최대한 배려해야 성사될 수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은 대국을 회피할 사람들이 아니다. 숨 막히는 벼랑 끝 대결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온 프로페셔널 킬러들 아닌가. 승부를 피하는 승부사는 이미 승부사가 아니다. 이 점에서 두 사람은 누구보다 투철하다.

복싱 팬들이 지금도 못내 아쉬워하는 것이 장정구 대 유명우의 한 판 승부가 끝내 불발로 끝났다는 점이다. 장정구는 WBC 라이트플라이급 15차 방어, 유명우는 WBA 주니어플라이급 17차 방어의 주인공이다. 장정구가 불과 11개월 앞서 태어났을 뿐이니 사실상 동갑이다.

챔피언 재위 기간은 장정구가 83년부터 88년, 유명우는 85년부터 91년까지다. 같은 시대, 같은 주먹계에서 같은 체급대를 평정했던 51세 장정구와 50세 유명우의 한 판은 이제 볼 수 없다. 하지만 ‘60대 청년‘ 조훈현과 조치훈의 반상 대결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이야 말로 바둑계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양조 대결’의 목적이 둘 간의 승패를 꼭 가리자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두 거목이 마주 앉아 수담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바둑계에 끼치는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두 천재가 웃는 낯으로 수담을 나누는 모습 이상으로 한민족 전체가 으쓱할 만 한 광경도 없을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두 거목 간에 벌어지는 ‘세기의 황혼대결’을 꼭 보고 싶다. 34년 전처럼 대형 언론사나 뜻 있는 후원자가 나타나 당시의 감동을 재현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